일상적 현실이 모습을 드러낸 유일한 순간_이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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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개인전, 원앤제이갤러리, 2008
전시카탈로그 서문


일상적 현실이 모습을 드러낸 유일한 순간

글.이대범 (미술평론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것이 ‘재현하는 내용’과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을 동시적으로 인식한다. 이 중에서 상대적으로 쉬운 것은 재현하는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의식할 수 있는 관습적 체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 감상자는 재현자의 탈주를 예방하고, 그곳에서 안도한다. 그러나 중심을 이동 시켜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에 방점을 찍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관습체계에 머무르고 있던 요소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탈주를 꿈꾼다. 재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전달하지 않고자 하는 작품의 무의식이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에 나타난다. 재현자와 감상자의 미묘한 불협화음은 여기서 발생한다. 감상자의 인식 바깥에 존재하는 것을 재현자가 작품에서 환기 시킬 때, 자신의 인식의 바깥을 바라봐야 하는 감상자는 불안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작품의 본래적 의미가 기거(寄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박진아의 작품으로 눈을 돌려보자.  


1. 재현하는 내용 :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일단, 특정 공간(야외, 파티, 밤의 공원, 전시장)에 놓인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특별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 잠시 잠을 자거나, 무언가를 먹는 순간에 있거나, 우두커니 서 있거나 앉아 있다. 혼자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많을 때에도 그들은 그냥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존재로 공간에 놓여 있다. 그들은 작가의 주변 인물들로 특정한 누군가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마저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어떤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2: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 :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캔버스 위를 빠르게 지나간 붓의 흔적들은 대상을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오히려 대상은 화면에 어눌하게 안착해 있다. 재현된 대상에게 향할 수 있었던 시선의 지향점을 붓의 흔적들이 독차지한다. 그렇다고 대상을 무의미한 존재로 환원시키지도 않는다. 분명 대상은 세세한 묘사가 따르지 않지만, 순간의 기억과 감정을 담아내듯 빠르게 지나간 붓질, 그것들이 중층적으로 쌓이면서 만들어 놓은 색과 톤, 그리고 화면의 구성이 대상을 담담하게 그러나 더욱 명료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시선이다. 작가는 대상과 객관적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철저한 관찰자 시점에 놓여 있다. 주변 인물,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는 시간을 담아내면서도 말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시선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별자로서 자신의 일(특별하지 않은 일)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왁자함으로 가득한 공간을 기표로 사용하고 있지만, 대상들은 외로운 섬과 같이 다른 대상들과 분절되어 있다. 주변 인물,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는 시간을 담아내면서도 말이다. 즉, 그는 대상과 대상,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고 있는 정서적․심리적 서정성의 세계를 화면에 재현하고 있다. (<문탠(Moontan)> 시리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으나, 이들의 행동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동일한’이라는 수사는 ‘상이한 혹은 개별적’이라는 수사로 대체된다. 그러면서 재현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들의 바깥이다. 그리고 다시 바깥은 대상으로 침투하여 대상을 재현한다.)


EAT, SLEEP, HAVE VISIONS.

박진아의 그간의 작업에서 ‘재현하는 내용’과 ‘재현하는 방식’은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 변화가 있다면, 분할된 화면에서 하나의 화면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2개 또는 4개의 화면에서 하나의 화면으로 옮겨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전 개인전 제목(<여가(餘暇)>, <Excursion>)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회적 생산체계에서 무의미한 행동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들은 특히 화면에서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인물의 행동에 의해서 구체성을 지닌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4개의 화면은 시간의 차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성과 붓 터치를 통해 회화적 차이를 드러내기에 적합했다. 그들은 하나이면서 미묘한 차이(단순히 시간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측면에서)에 의해 하나가 아니다.

분할된 화면은 <문탠(Moontan)>연작에서 하나로 합치된다. 가운데 펼쳐져 있는 돗자리가 상징하듯 그들은 하나의 목적으로 이곳에 모였다. 그러나 박진아가 포착한 그들의 모습은 산만하다. 각자가 자신의 소소한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분할된 화면에서 볼 수 있었던 미묘한 차이들이 한 화면에서 다른 인물들을 통해 조합된다. 그러기에 이들의 모습은 중심에 있는 돗자리에 모이지 못하고 그 주변을 부유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소기의 목적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문탠(Moontan)>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두운 배경은 또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어두운 배경은 주변부를 차단하면서 이 상황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 인물들이 중심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듯이, 이 공간 역시 전체의 그 어떤 곳에서 떨어져 있는, 겉돌고 있는, 부유하는 공간으로 설정된다.)

박진아는 이번 전시에서 개별적 행위를 특정 행위로 제한을 둔다. 그리고 공간은 더욱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를 선택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면서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박진아의 그림 속 사람들은 작가가 제시한 제한된 행위를 하면서 그 시공간으로부터 일탈해 있다. <마지막 한 입>에서 화면의 중심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을 따라가 보면 화면 중심에서 어떤 인물이 무언가를 막 먹으려는 순간과 마주한다. 주변 정황을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다가 지나갔을 자리이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그들의 흔적만이 있을 뿐 사람은 없다. 모든 정황은 생략되고 중심인물의 단지, 먹는 행위 자체만이 부각된다.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적 공간과 가장 본능적 행위가 교차한다. <잠>에는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 역시 파티에서 떨어져 있다. 화면의 중심에 인물이 놓여 있지만, 이 인물은 분명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공간의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다. 공간에 놓이지 못하고 외부로 벗어나 있는 인물의 묘사는 <감나무아래 피자먹는 남자>에서도 발견된다. 감나무 아래 남자는 허겁지겁 피자를 먹고 있다. 감나무와 피자의 조합은 낯설다. 즉, 이 남자는 피자를 먹고 있는 어떤 공간에서 벗어나 있다. <프로젝터 테스트>와 <그랜드 피아노>의 인물들은 앞선 작업들과 다르게 무언가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시선의 방향도 일치하거나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는 공간이 인물을 압도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박진아는 공간보다는 그 속의 인물, 인물 보다는 그 행위 자체에 방점을 두었다. 그런데 이 두 작업은 공간이 인물을,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압도하고 있다. 프로젝터의 푸른빛과 화면 중심에서 관처럼 놓여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공간 전체 정서를 만들어 낸다.

박진아는 일상적 삶의 순간을 그린다. 그러기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쉽게 마주 할 수 있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순간으로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긴 여운을 관객에게 야기한다. 그것은 그가 ‘재현하는 내용’이 아니라 ‘재현하는 방식’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박진아는 가장 일상적인 순간을 제시했지만, 관객은 이 순간을 통해 가장 불안한 순간을 경험할 수 도 있다. 자신의 구축한 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그 순간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인간의 일상적 현실이 모습을 드러낸 유일한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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